[이응준의 시선] 예술가의 자유와 인간의 도덕

입력 2024-02-08 16:21   수정 2024-02-09 00:47

남한의 대중문화를 접한 북한의 한 중학교 교사가 ‘자유민주주의’ 지하 정당을 건설하다가 체포된 사실이 최근 전해졌다. 사상교육용 영상자료에서 북한 보안당국이 ‘스스로 밝힌’ 내용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위험한(?) 단어가 북한 사회에서 처음으로, 또한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김씨 왕조에 매우 불리할 텐데도 그런 것을 보면, 개인이건 집단이건 망할 때는 어리석음이 블랙코미디가 되나 보다.

북한은 2020년 12월 남조선 영상물 유포 시 사형에 처하는 등의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제정 시행 중이다. 실지로 남한 드라마를 본 북한 청소년들이 공개 처형당했다. 배고픔보다 무서운 게 호기심이다. 이게 국가도 무너뜨리고 세계도 변화시킨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파견돼 있는 북한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미봉책으로 막았지만, 어디서든 또 터질 것이다. 똑같은 조선사람이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70년 이상을 지내온 끝에 이토록 모든 면에서 달라진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체제’ 때문이다.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고 결정한다. 정치이념에 대한 혁명적 움직임이 북한 내부에서 꿈틀대고 있다.

1993년 3월 9일 KBS TV 심야 토크쇼에 지금은 둘 다 고인(故人)인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가 함께 출현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다가 일시 귀국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을 받아서였다. 신상옥은 최은희와 이혼했으나 최은희가 1978년 1월 14일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자 그녀의 행방을 찾다가, 그 역시 같은 해 7월 19일 홍콩에서 납북됐다. 영화광 김정일의 지시였고 낙후된 북한 영화 발전이 목표였다.

신상옥은 한국현대영화의 본격적인 장을 연 감독이고 최은희는 슈퍼스타 여배우의 원조 격이다. 무엇보다, 본의 아니게,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큰 영화들을 만든 감독과 배우로서 기념비적이다. 신상옥은 1960년 신필름을 설립했는데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형태의 기업형 영화사로서 배우, 작가, 감독, 촬영감독, 녹음기사, 실내 촬영소 등 영화 제작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자체 조달했다.

그러던 신상옥이 결국 파산한 데에는 유신정권 하에서의 ‘부족한’ 예술의 ‘자유’가 근본 원인이었다. 1975년 홍콩과 합작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중 사전검열 과정에서 삭제된 키스 장면을 극장에서 틀어버린 게 사달의 시작이었다. 요는, 표현의 자유 침해로 국제경쟁력이 없었고 중앙정보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제기하다가 곤욕을 치른 것이다. 신상옥은 이런 나라에서는 더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며 외국으로 나가버렸고, 이윽고 북한에 납치까지 당한 건데 그가 자진 월북한 게 아니냐는 오해가 잠시 있었던 이유다. 정작 신상옥은 북한에서의 8년 중 영화 활동은 3년 정도뿐이고 초반 5년간은 거듭 탈출을 시도하다가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 1986년 3월 13일 최은희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돌입, 탈북에 성공한다.

어떻게 탈출이 가능할 수 있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신상옥은 의미심장한 답변을 한다.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권력과 자금과 온갖 특혜들을 제공하는데 설마 싫어서 떠나겠느냐는 생각을 북한은 가지고 있었다고. 정작 신상옥은 북한을 딱 본 그 순간부터 그런 ‘완전전체주의’ 사회를 견딜 수가 없었다. 왕족 같은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나의 실존은 늘 김정일의 허락 안에 있는 가짜 자유였고, 나도 있고 남도 있는 자유라야 진짜 자유니까. 자유경쟁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고, 유신시대도 북한에 비하면 천국이지. 그의 이런 소회들은 비록 부족한 자유일지라도 그 올바른 방향성과 역사적 결과를 숙고하게 한다.

대한민국에 살다 보면 ‘결정적 자기모순’에 빠진 사람들, 특히 그런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많이 본다. 민주화 투사라면서 김정은을 옹호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노예는 남도 노예로 만든다. 정치인들은 연예인들 북한 데리고 가서 인류 최악의 독재자 옆에서 웃으며 사진 찍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인권침해이며, 양심 파괴행위다. 예술가의 자유와 인간의 도덕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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